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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미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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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을 가다(파주삼릉)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왕릉을 관리하는 공직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능권무직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세조가 관제개혁을 한 이후 능참 봉직이 생겼다.
능참 봉직은 비록 종9품에 해당하였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관료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의 청직(淸職)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능참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반의 신분이어야 했다. 보통 생원, 진사 혹은 유학 중에서 임명이 되었으며,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파주 삼릉이라고 일컫는 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과 순릉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능에 잠든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에 예문관 제학 한상질의 손자이자 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여 공신의 자손을 관리로 특채하던 문음(門蔭) 제도에 의해 38세 때인 1452년(문종 2) 궁을 지키는 일로, 다소 보잘 것 없는 경덕궁직을 맡게 되었다.

그가 말단관직에 간신히 올랐을 때에는 이미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나이의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이다. 이 때 그는 지인 권람 등을 이용하여 단종의 삼촌이었던 수양대군과 결탁,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차례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키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일개 궁지기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한명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슬하의 1남 4녀 중 첫째 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넷째 딸은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명회로 하여금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는 왕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로 하여금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는 왕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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