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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미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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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폐허된 경복궁, 270년간 왜 복원 못했을까? [더,오래] 1탄

중앙일보에 연재한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궁궐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와 건축의 유래를 알고 본다면 궁궐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좀 더 궁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조선 시대의 궁궐이 있는 곳은 모두 서울의 한강 북쪽 지역이다. 궁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지금의 넓은 서울이 아닌 본래 조선 왕조의 수도 한양(漢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했으나 역성혁명이었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해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지만,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치고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경에서 천도를 결심한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게 하고, 같은 해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고 천도를 명령한 태조는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터를 정한 뒤, 그해 10월 25일 역사적 한양천도를 단행했다.

조선 왕조가 새 도읍지로 선택한 한양 땅은 넓은 분지 형태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다. 한양의 입지조건은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전쟁과 왜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약 18Km의 청계천이 외수인 한강과 합수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물길로 수운(水運)에 의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즉 한양은 지형적으로 정치·경제·교통·국방의 요충지로서 제반여건을 고루 갖춘 천혜의 길지였다.

우리나라 궁궐은 고대 중국 궁궐제도의 규범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는 유교적 군주관을 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던 중국 주나라시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경복궁의 왼편(동쪽)에 국가 사당인 종묘(宗廟)를, 오른편(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두어 종묘에 왕의 조상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사직단에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번영과 안위를 빌었다.

지금 서울에는 조선 시대에 법궁(法宮)이나 이궁(離宮)으로 쓰였던 다섯 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법궁은 왕이 주로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핵심 궁궐을, 이궁은 필요에 따라 옮겨 갈 수 있는 여벌의 궁궐을 각각 말한다. 서울의 주산 백악에 기대어 지은 경복궁은 반듯한 터에 전각들도 남북축에 맞추어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백악이 동쪽으로 흐르다 솟은 응봉의 한 줄기는 창덕궁의 인정전을, 또 한 줄기는 창경궁의 명정전을 받쳐주고, 그 남쪽 산줄기는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다. 경희궁은 백악의 서쪽 인왕산에 기대어 지은 궁궐이고 덕수궁은 원래 이름이 경운궁으로 고종 대에 지은 대한제국의 황궐(皇闕)이다. 조선 왕조가 이 다섯 궁궐을 모두 동시에 운영했던 것은 아니고 시기적으로 번갈아 사용하다 폐쇄하기도 하고 또 새로 지어 오늘 다섯 궁궐이 남게 된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0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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